LIFESTYLE 고전 건축에서 새로 시작하는 삶

지난 30여 년간 주거와 상업 공간을 넘나들며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쌓아온 건축가가 이제야 자신에게 딱 맞는 집을 마련했다. 이탈리아 볼로냐의 15세기 고전 건물에 펼쳐진 일터와 삶터가 공존하는 이상적인 집으로.

2021.11.16
페이스북 트위터 링크

바로크와 신고전주의가 겹치는 시기에 탄생한 15세기 저택의 전통미를 되살린 거실. 천장과 벽면 몰딩과 벽화는 전문가의 손길로 복원되었다. 집주인인 건축가 카롤라 푸마롤라가 앉아 있는 소파는 파트리시아 우르퀴올라가 디자인한 것으로 B&B 이탈리아 제품.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나고 자란 건축가 카롤라 푸마롤라(Carola Fumarola)에게 이상적인 삶의 터전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 공과대학으로 유명한 폴리테크니코 디 토리노(Politecnico di Torino)에서 건축을 전공한 카롤라는 졸업 후 토리노의 한 건축 사무소에서 경험을 쌓고 20대 후반에 들어설 무렵 자신의 스튜디오를 차려 독립했는데, 이때 그녀가 정착지로 결정한 곳은 다름 아닌 어머니의 고향 볼로냐(Bologna)였다. “아버지는 이탈리아 남부, 어머니는 북부 볼로냐 출신이에요.” 같은 나라지만 남부와 북부의 문화와 기질이 뚜렷하게 다르다 보니 카롤라는 토리노 태생이지만 이탈리아 남부와 북부의 특장점을 자연스럽게 접해왔고, 그 안에서 견문을 넓히고 편견 없는 취향과 안목을 키우면서 건축가로서 다방면으로 활동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게 되었다고. 

 

 

방과 방이 연결된 구조의 고택 내부. 거실과 다이닝룸 사이에 자리한 스터디룸은 빨간색을 테마로 연출했다. 문 옆 벽면에 자리한 유광의 빨강 캐비닛 ‘브라만테(Bramante)’는 일본 건축가 가즈히데 다카하마(Kazuhide Takahama)가 디자인한 것으로 까시나(Cassina) 제품이다. 

 

나무가 푸르게 우거진 정원 전망을 품은 스터디룸. 프레스코와 몰딩 원형을 되살린 천장에 과감하게 빨간색을 더해 현대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우드 테이블은 이탈리아 건축가 카를로 스카르파(Carlo Scarpa)가 디자인한 ‘발마라나(Valmarana)’, 가즈히데 다카하마 디자인의 스틸 프레임 의자 ‘가자(GAJA)’는 까시나 제품이다.  

 

 

카롤라가 건축가로서 첫발을 내디딘 분야는 오래된 건물의 구조 통합 및 보존 복원 프로젝트였다. 역사적 건물을 보존하고 개조하는 능력이 필수에 가까운 이탈리아 건축가로서 이러한 경험 과정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카롤라의 인식 속에도 오래된 건물은 익숙한 존재이자 동반자라는 개념이 내재되었다. 특히 어려서부터 접한 볼로냐는 고대 건축 양식의 진수가 담긴 성당과 유서 깊은 건축물이 많은 고도(古都)로 카롤라가 건축가로서 기반을 잡고 성장하는 데 훌륭한 터전이 되어주었다. 볼로냐에서 시작된 카롤라의 건축 사무소 아케이드(ARCADE)는 지난 25년간 주거와 상업 공간을 넘나들며 다양한 프로젝트를 실행하며 명성을 쌓았고, 특히 역사적인 건축물을 현대적으로 재건축하는 카롤라만의 특별한 감수성을 적용한 결과물은 클라이언트들로부터 극찬을 받으며 그녀를 성공한 건축가 반열에 올려놓았다. 

 

 

둥근 아치 천장 구조가 매력적인 다이닝룸. 집이 지어질 당시 천장을 장식한 14세기 프레스코를 복원한 공간에 블랙&스틸 소재의 이탈리아 모던 디자인 가구와 몽환적인 포르나세티 도자기 소품으로 세련된 미학적 대비를 표현했다. 

 

 

“저는 제가 하는 작업이 맞춤 정장을 제작하는 재단사와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옷을 입는 사람의 체형에 맞게 옷본을 설계하고, 옷감을 선택하고 자르고 꿰매어 몸과 마음에 딱 맞아떨어지는 결과물을 내는 과정이 곧 제가 건축 디자인에 임하는 자세와 같습니다. 무엇보다 오래된 건축물을 대할 때는 제 생각을 먼저 개입시키기보다는 건물과 장소의 역사와 의미를 탐구한 후 그곳에 펼쳐질 미래의 비전을 대입하죠. 공간의 실리적인 기능뿐 아니라 심미적인 인테리어에 이르기까지 모든 디테일에 심혈을 기울입니다. 저는 역사적인 공간을 개조해 쓰는 사람들이 그곳을 박물관처럼 감상과 경외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보다는 그 장소가 품은 독보적인 분위기를 느끼며 생활할 수 있도록 디자인하는 데 초점을 맞춰요.” 

 

 

카롤라가 운영하는 건축 스튜디오. 화이트 큐브 같은 스튜디오에 놓인 대형 책상은 옛날 목수가 사용하던 작업대를 재활용한 것이다. 세미 코린트 스타일의 기둥 위로는 프레스코 장식의 돔 천장이 있다. 

 

 

고전 건물뿐만 아니라 커머셜 브랜드의 리테일 쇼룸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실행하며 방대한 포트폴리오를 구축한 카롤라는 얼마 전 볼로냐 시내 중심에 자신의 진정한 대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공간을 완성하며 새로운 출발을 알렸다. 볼로냐의 심장인 마조레(Maggiore) 광장에서 1k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한 팔라초 포에티(Palazzo Poeti) 내에 집과 일터를 함께 마련한 것. 바로크와 신고전주의 양식이 교차하는 건축미가 특징으로 15세기 후반에 지어진 팔라초 포에티는 역사적인 의미가 깊은 건물이지만 몰락한 귀족 가문의 소유지로 건물 일부는 대형 아파트로 개발되었고, 나머지 공간은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하지만 건축가 눈에 비친 공가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남다른 잠재력을 지닌 매력적인 존재로 다가왔고, 이내 사랑에 빠져버렸다. “이곳을 둘러본 순간 저는 여기가 제집이자 직장이 공존할 수 있는 이상형임을 직감했습니다. 자연 채광이 풍부하게 들어오고 유서 깊은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창문이 즐비한 실내는 반대편에 자리한 창문을 통해 도시의 활기 넘치는 풍경도 감상할 수 있는 동시에 사생활이 보호되는 고요함이 공존하죠.” 500㎡ 규모에 22개 방이 일렬로 늘어선 단층 구조는 방과 방이 문으로 연속되는 옛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각 공간에는 바로크와 신고전주의가 절충되는 시기에 나타난 돔 천장, 프레스코, 정교한 나뭇잎 장식의 몰딩이 있는 프렌치 스타일 창문과 주철로 된 난간이 있는 발코니 등이 있었다. “집과 스튜디오를 같은 장소에 마련한 이유는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건축물을 통해 나를 표현하는 것만큼 의미 있는 작업은 없을 거라는 확신에서였습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도 이 공간은 고전 시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건축 디자인적 요소를 함께 경험하고 탐구하며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거라 생각했고요.” 

 

 

카롤라가 오래전부터 수집한 가구와 소품으로 꾸민 서재. 검은색 말 형상의 조명, 어머니가 모아둔 게임 보드를 그림 작품처럼 걸어둔 벽 장식, 고전적인 흔들의자, 기하학 패턴의 카펫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디자인이 한 사람의 취향을 통해 조화를 이룬 모습이 인상적이다. 조명은 무이(Moooi), 카펫은 cc-tapis, 흔들의자는 토넷(Thonet) 제품.  

 

 

이런 의미에서 팔라초 포에티는 집 안팎으로 볼거리가 풍성하다. 조각상이 있는 분수를 중심으로 단일 식물로 조성된 방사형 정원, 중세 후기 볼로냐에서 시작된 마감 기법인 벽돌의 질감을 부각시키고 벽돌 벽의 보호를 위해 천연 석회 가루 반죽을 덧입히는 사그라마투라(Sagramatura) 외벽, 우아한 세미 코린트 양식의 기둥, 규칙적으로 분포된 아치형 개구부와 커다란 아치형 포털이 있는 단순한 회벽 등 15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사이에 진행된 건축물의 원형과 변화가 한 건물에 담겨 있다. 

 

 

천장 구조가 노출되면서 드러난 나무 들보와 서까래는 스틸과 우드의 조합으로 완성한 주방 디자인의 주요 모티프가 되었다. 깔끔하면서도 따뜻한 분위기가 감도는 주방은 3차원적인 공간감을 선사하는 블랙&화이트 지오메트릭 패턴 타일 바닥 덕분에 넓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주방 조리대는 보피, 파트리시아 우르퀴올라 디자인의 바닥 타일은 무티나(Mutina) 제품, 우드 벤치는 카롤라가 직접 디자인했다.

 

 

프레스코가 있는 돔 천장을 포함해 고대 고딕 양식에서 르네상스, 네오클래식에 이르는 흔적이 깃든 카롤라의 집과 스튜디오는 엔지니어링 부분과 마감재, 아치형 천장을 물들인 유서 깊은 프레스코 복원까지 무려 2년의 시간이 투자되었다. 그중 시간과 정성이 가장 많이 들어간 부분은 흰색 회벽 마감으로 숨겨져 있던 17, 18세기 그림을 발굴해낸 작업. “원래는 갈색 프레임과 흰색 석회로 가려졌던 19세기 벽화를 복원하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다양한 색상 조합이 돋보이는 17세기 프레스코를 발견했답니다.” 뜻하지 않게 발굴한 오리지널 프레스코는 많은 전문가를 필요로 했을 뿐만 아니라 관련 감독 기관의 승인을 받는 절차 등으로 별도의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집의 원형을 복원하는 일등 공신이 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역사적, 예술적 자산이 되는 건물을 개조하고 복원할 때는 전문가들로 구성된 기관으로부터 프로젝트의 적합성에 대한 현장 조사와 승인을 받아야 하고, 그 작업만 1년여 지속될 만큼 중요합니다.” 

 

 

모던한 블랙 다이닝 테이블과 어울리는 블랙&화이트 플레이팅. 레이스 패턴의 사각 접시는 이탈리아 보르보네제(Borbonese) 제품이다.   

 

 

카롤라는 팔라초 포에티가 지닌 장소의 역사성을 존중하고 건축적 묘미를 고취시키는 맥락에서 현대적 디자인을 도입해 전통과 현재가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집과 스튜디오를 만들 것을 지향했고, 그녀의 오랜 경력과 경험은 매우 절제된 디자인 언어로 간결하면서도 명쾌하게 고전미를 현재 시제로 되살리는 마법을 부렸다. 원래 카롤라의 스타일이라 하면 모노크롬 컬러와 미니멀한 세련미로 요약할 수 있는데, 별다른 장치 없이 자신의 인테리어 디자인 화법을 충실히 이행한 것만으로 500년 넘는 시간의 간극을 균형 있게 극복해냈다. “강렬한 정체성을 지닌 장소의 영혼이 저를 이끌었다고 해야 할까요. 본래 공간이 품고 있던 개성을 끄집어내고 여기에 현대적 기능을 더하다 보니 위엄과 전설로 가득 찬 고전 공간 특유의 분위기도 포근한 집처럼,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샘솟을 수 있는 근무 환경으로 전환할 수 있었습니다.” 

 

 

현관 복도에서 서재와 주방으로 이어지는 관문에 자리한 전실. 원형 대리석 테이블 위에 놓인 기마상이 숲속의 동물을 그려 넣은 벽지로 마감한 문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대리석 테이블은 아가페(Agape), 기마상 세라믹은 엔자 디 파사노(Enza di Fasano) 제품. 

 

 

카롤라는 팔라초 포에티가 본래 공간의 본질에 충실한 가운데 사는 이의 이야기를 품은 개성적인 공간이 되기를 바랐는데, 이때 유효하게 작용한 것은 동물 장식과 컬러 대비다. 문을 열 때마다 각 공간이 감탄사를 자아낼 만큼 놀라움을 선사하길 원한 카롤라는 자신이 수년간 모아온 동물 오브제를 적재적소에 풀어놓았다. 말 모양의 램프, 돼지 형상의 사이드 테이블, 회전목마, 까마귀 발 모양의 다리를 지닌 테이블 등 현대 디자이너의 위트 있는 가구와 오브제는 기괴함과 유머러스함을 오가며 오묘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수풀 속 동물이 그려진 벽지로 마감한 복도는 마치 숲속을 걷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마치 선사 시대 동물이 우리 집에서 풀을 뜯으며 서식하는 풍경이랄까요. 저는 그래서 이 공간의 프로젝트를 ‘야수의 집’이라고 명명했어요.” 한편 방마다 존재하는 프레스코 안에서 메인 색상을 뽑아 가구와 소품에 적용해 과감한 대비나 차분한 조화를 실험하면서 공간 전체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이 규칙에서 예외가 있다면 장식적으로 참고할 만한 요소가 없는 곳인데, 그런 곳에는 투톤 컬러를 사용하여 벽과 천장의 수직적 연속성을 차단하고 그 불균형을 해소해 모던한 느낌을 강조했다. 

 

 

고택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천장의 나무 들보가 돋보이는 침실. 블랙 컬러의 미니멀한 모던 디자인 가구와 컨템퍼러리 아트워크를 통해 고대와 현대를 명료하게 구분하고 있다. 그림은 디미트리스 바코파노스(Dimitris Bakopanos) 작품.

 

 

오랜 시간 공들인 팔라초 포에티에서 집주인이 각별히 아끼는 공간은 주방이다. 스틸과 우드 소재의 매끈한 주방 가구와 3차원적인 시각적 묘미를 선사하는 블랙&그레이 지오메트릭 패턴 타일로 마감해 마치 규모 있는 유명 레스토랑의 주방을 방불케 하는 이곳의 주방은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모습으로 놀라움을 안겨준다. ”제가 이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주방이에요. 남부 이탈리아 출신인 아버지 영향을 받은 만큼 저도 요리하는 걸 무척 즐기고 제법 잘하기 때문에 셰프에게 헌정하는 넓은 주방 환경을 만들고 싶었어요.” 가족은 물론 손님과 동료들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기를 즐기는 카롤라는 코로나 사태가 지나고 나면 이 주방에서 이탈리아 요리 클래스나 건축, 예술, 영화 등의 이벤트가 열릴 수 있게끔 공간을 공유할 생각이다. 

 

 

둥근 욕조와 세면대, 원형 거울, 구형 조명 등으로 편안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를 연출한 욕실. 욕조와 세면대는 파트리시아 우르퀴올라 디자인으로 아가페 제품, 위트 있는 사진 장식이 더해진 거울은 셀레티(Seletti) 제품이다. 

 

 

“이 집은 개인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를 지나온 후 도전한 디자인으로, 어쩌면 나의 미래를 위한 궁극적인 프로젝트일지 모릅니다. 단순히 저와 가족을 위한 사적인 공간을 넘어 건축가로서 많은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고 교류하며 정서적 공감대를 이루는 환경 속에서 의욕적으로 일하고자 하는 제 목표가 담겨 있기 때문이죠.”       

 

STYLING Francesca Davoli

 

 

 

 

 

 

 

 

 

더네이버, 리이프스타일, 공간

CREDIT

EDITOR : 이정민PHOTO : Fabrizio Cicconi(Photofoyer)

아이매거진코리아닷컴, 더네이버, 동방유행
©imagazinekorea.com,
©theneighbor.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