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고은성의 맨얼굴

뮤지컬 배우 고은성은 더 이상 있어 보이는 것에 관심이 없다. 가발을 집어 던지고 속옷 속 토마토를 꺼내 으깨버린 헤드윅처럼, 자신을 감추는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걷어내고 무대에 선다.

2021.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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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스트라이프 슈트, 니트 톱, 보디슈트는 모두 프라다.

 

 

인터뷰이를 대면하기 전 늘 무대 위의 상대방을 상상해본다. 서른두 살, 데뷔 10년 차, TV 프로그램 <팬텀싱어> 시즌 1 결승팀 중 하나인 흉스프레소의 막내로 대중에게 눈도장을 찍고, <헤드윅>의 주인공으로서 첫 공연을 앞둔 뮤지컬 배우 고은성. 성 전환에 실패한 트랜스젠더이자 로커 ‘헤드윅’이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끌어가는 콘서트 형식의 뮤지컬 <헤드윅>은 많은 배우들이 꿈의 무대로 꼽는 공연이다. 이러한 행운이 그에게 갑자기 찾아온 것은 아니다. 2011년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싱어를 시작으로 <그리스>의 대니, <비스티 보이즈>의 강민혁, <노트르담 드 파리>의 페뷔스, <그레이트 코멧>의 아나톨 등 쉬지 않고 작품 활동을 펼치며 차근차근 경력을 쌓았다. 그 사이 방송 활동과 콘서트를 병행했고 올해는 데뷔 10주년을 기념해 첫 솔로 앨범과 단독 콘서트도 치렀다. 아마 타고난 열정가이지 않을까. 예전에 진행한 인터뷰를 보니 뮤지컬에 대한 마르지 않는 애정을 지녔고 지루한 건 견디지 못하는 쾌활하고 밝은 성격 같다. 눈에 장난기를 가득 머금은 천진한 청년의 모습이 그려졌다. 하지만 촬영장에서 실제로 만난 고은성은 말수가 적었다. 매 순간 진지했고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질문은 오래 곱씹었고 답변의 의미를 적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긴 생각의 실타래를 가감 없이 풀어 보여줬다. 몇몇 답변은 이런 말로 운을 떼며 시작했다. “제가 예전에는 이렇게 말했죠? 지금은 그때와 생각이 조금 달라졌어요.” 상상했던 그의 모습과 실제 분위기가 다른 이유를 깨달았다. 과거의 한 시점에 머무는 고은성을 머릿속 무대에 올렸기 때문이다. 그는 매 순간 변화하고 있었다.

 

 

 

실크 톱, 재킷, 팬츠, 벨트는 모두 디올 맨.

 

 

2021년 뮤지컬 <헤드윅>의 주연 배우 중 한 명으로 발탁됐어요. 뮤지컬 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헤드윅>은 워낙 유명한 작품이었죠. 뮤지컬계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기도 했고요. 대선배님만 맡을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서 제가 캐스팅된다는 건 굉장히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지금 드는 생각은 딱 하나예요. 작품에 누를 끼치지 말자(웃음).


<헤드윅>을 관객의 입장에서 처음 보았을 때 기억나요? 막 뮤지컬 공부를 시작한 20대 초반에 <헤드윅>을 영화로 한 번, 뮤지컬로 한 번 감상했어요. 제가 처음 뮤지컬에 빠지게 된 계기가 <노트르담 드 파리>인데, <헤드윅>을 보기 전까지 뮤지컬 넘버는 <노트르담 드 파리>처럼 무조건 웅장하고 클래식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신나는 펑크 록부터 발라드, 포크까지 다양한 장르의 넘버가 쉴 새 없이 이어지는 <헤드윅> 공연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죠. 


주연 배우로 캐스팅된 지금과 예전을 비교해봤을 때,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을 거 같아요. 맞아요. 돌이켜보면 그때는 작품이 가진 깊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어요. 지금은 당시에 무심코 지나쳐버린 장면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며 새롭게 느껴지더라고요. 근데 이건 제가 주연 배우로 발탁된 덕분이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며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 점이 훨씬 크게 작용한 거 같아요.

 

시선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궁금하네요. 예전엔 캐릭터를 바라볼 때 헤드윅이 처한 특수한 상황 때문에 스스로와 분리시켜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헤드윅이란 캐릭터가 놓인 상황 이전에 그 또한 나와 다를 바 없는 한 인간임을 먼저 생각하죠. 그러자 헤드윅이란 캐릭터가 가진 여러 가지 면모가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셔츠는 알렉산더 맥퀸.

 

 

그래도 헤드윅이란 캐릭터가 워낙 복합적인 인물이라 해석하기 쉽지 않겠어요. 평소 새로운 캐릭터는 어떻게 분석해요? 그건 때마다 달라요. 다만 공통적으로 지키는 건 캐릭터 해석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지 않기예요. 최대한 빠르게 캐릭터를 이해하고 체화시키려 하죠. 무대 위 캐릭터의 모습은 결코 배우의 모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거든요. 고은성이 연기하는 헤드윅은 결국 제가 살아오며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행동해요. 그래서 캐릭터를 머리로 분석해 외워 연기하는 것보다 중요한 게 어떻게 제가 헤드윅이 될 수 있는가예요. 대본에 없는 상황이 닥치더라도 정말 그 캐릭터처럼 행동할 수 있게 말이죠. 특히 헤드윅의 경우 분석해서 외운 대로만 연기해서는 표현하기 힘들어요. 그래서 이번엔 더 스스로를 열어두고 깨어 있으려 했어요. 


고은성만의 헤드윅을 준비하며 캐릭터와의 공통점과 차이점도 발견했을 거 같아요. 네, 저와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닮았고,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다른 존재예요.


어떤 점이 닮았는지 궁금한데요. 우선 표면적으로는 꿈을 좇아 먼 여정을 떠났다는 점이 닮았죠. 헤드윅이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간 것처럼 저 역시 뮤지컬을 공부하고 싶어 고향인 대전에서 아무 연고가 없는 서울로 혼자 올라왔어요. 당시 집안 사정이 좋지 못해 지원받으며 공부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반지하에 살며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배달, 택배 상하차 등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하며 꿈을 키웠죠. 


내면적으로는요? 감추고 싶은 자신의 약점을 결국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게 됐다는 점요. 헤드윅이 가발을 쓰고 짙은 화장으로 자신을 감춘 것처럼 저 역시 제가 처한 상황을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괜히 더 있는 척하고 쿨해 보이려 애썼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꾸며낸 모습을 나 자신이라 믿고요. 그런데 서른을 넘어갈 즈음 이게 진짜 내 모습이 아니란 걸 깨달았죠.  


깨달은 계기가 있을 거 같은데. 군대에 있을 때 했던 생각이 영향을 미쳤어요. 근데 그때는 추상적으로만 생각했지 지금처럼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았어요. 제대 후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과 TV 프로그램 <팬텀싱어 올스타전>을 동시에 준비하던 시기, 우연히 책에서 ‘너 자신이 누군지 알라’는 구절을 봤어요. 굉장히 뻔한 말인데 당시 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있어서 그런지 크게 와닿더라고요. 코로나19로 인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며 노트에 자주 이것저것 끄적였는데 캐릭터를 분석하듯 스스로를 분석해보자 싶었어요. 제가 어디서 태어났는지부터 시작해 어렸을 땐 뭘 좋아했고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지 쭉 써봤죠. 생각보다 제가 스스로를 잘 몰랐더라고요. 그리고 여태까지 사람들에게 나의 약점을 감추고 선망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제는 감추고 싶은 부분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라고 생각해요. 


20대에 헤드윅 역할을 맡았다면 2021년의 헤드윅과 많이 달랐겠네요. 그럼요. 그래서 당시에 기회가 오지 않았던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가진 깊이의 한계가 캐릭터를 표현할 수 있는 깊이의 한계니까.

 

 

 

이너로 착용한 패턴 재킷은 모스키노. 레더 코트는 누마레.

 

 

헤드윅은 중독성 있는 넘버로 유명한 작품이잖아요. 가장 좋아하는 넘버 하나만 꼽아주세요. 작품을 거쳐 간 많은 배우들이 가장 좋아하는 넘버로 꼽을 거 같은데, ‘Wig in a Box’요! 잔잔하게 읊조리듯 시작해 밝고 경쾌한 멜로디로 이어지죠. 그런데 장면 상황과 가사를 보면 슬프고 외롭지만 이를 이겨내기 위해 참고 밝은 척한다는 걸 알 수 있어요. 반지하에 살던 시절 삶이 버겁게 느껴지곤 했어요. 이를 이겨내기 위해 종종 일부러 멋있는 옷을 차려입고 머리도 잘 매만지고 밖으로 나갔죠. 그러면 어쩐지 사람들이 전보다 더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 같고 제게 닥친 나쁜 상황도 사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거든요. 그때의 감정이 생각나는 넘버예요.  


가장 좋아하는 대사는요? 참 신기한 게 예전에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는데, 이번에 작품을 준비하며 크게 와닿은 장면과 대사들이 있어요. 그중 하나가 헤드윅이 가발을 쓰고 엄마에게 약간의 미안한 감정을 담아 이렇게 말하는 부분이에요. “엄마 나 어때? 사람들이 내가 여자라고 하면 속아줄까?” 어떤 심정으로 저 말을 했을지 상상하면 형용할 수 없는 복합적인 슬픔이 느껴져요.   

 

헤드윅에게 무대는 자신의 분노를 승화시키는 창구이자 스스로를 표현하는 공간이잖아요. 고은성에게 무대는 어떤 공간이에요? 굉장히 넓으면서 좁고, 신나면서 두려운 공간이요. 바다같이 무한해요. 내가 서프보드에 몸을 맡기고 파도를 타고 있다면 즐겁지만 맨몸으로 망망대해에 덩그러니 남겨진 상황이라면 두렵잖아요. 무대 역시 마찬가지예요. 잘 준비하면 무대가 아름다워지고 저 역시 즐길 수 있겠지만 반대로 준비가 미흡하면 제 부족한 모습을 고스란히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고 무대도 엉망이 되겠죠. 가끔 이런 꿈을 꿔요. 모든 스태프가 갑자기 저에게 당장 객석이 꽉 차 있는 무대에 나가야 한다고 재촉해요. 근데 제 모습을 보니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어요. 어떤 작품인지도 몰라요. 꿈 속에서 계속 생각해요. 지금 내가 어떤 대사를 해야 하지? 무대에 등 떠밀려 나가 노래를 해요. 그러다 화들짝 놀라며 꿈에서 깨죠. 무의식의 두려움이 반영된 거 같아요. 제게 무대는 양면성을 지닌 공간이기에 쉽게 생각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너무 어렵게 여겨도 안 된다고 늘 마인드 컨트롤해요.

 

 

 

레더 패널 셔츠, 슈즈는 모두 코스. 팬츠는 로에베.

 

 

이전 인터뷰에서 성격이 유쾌하고 유머러스하다고 말한 걸 봐서 그런지 무대에 두려움이 있는지 몰랐어요. 지루한 걸 못 참는다는 말도 덧붙였던데,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도 계속 반복하면 질리기 마련이잖아요. 권태를 느끼지 않는 비결이 궁금해요. 이젠 지루함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지루하다는 건 그만큼 나한테 이 일이 익숙해졌다는 거잖아요. 익숙하지 않던 시절을 생각하면 굉장히 좋은 신호죠. 그리고 지루함을 견디고 이겨내는 순간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어요. 그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반열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요? 참고 지속하는 것 또한 중요한 과정이라 생각해요. 그게 ‘노력’이고요. 

 

벌써 데뷔 10주년을 맞이했네요. 올해 초 첫 솔로 앨범을 내고 얼마 전 첫 단독 콘서트도 가졌어요. <헤드윅>의 무대도 처음 오르는 거네요. 올해 유독 처음이란 타이틀이 붙는 활동이 많은데 고은성에게 처음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처음’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고 해요. 특별하게 생각하면 스스로에게 취하게 되고, 자만하는 지름길인 거 같아서요. 물론 오랫동안 고대했던 작품의 첫 무대에 섰을 때 당연히 설레고 벅찰 수 있어요. 근데 이게 행동이나 표정으로 표출될 정도면 안 돼요. 관객들은 작품을 보러 온 거지 무대 위에서 혼자 벅차올라 연기하는 고은성을 보고 싶은 게 아니잖아요. 한 사람의 생애로서는 아름다운 순간이지만 배우이자 관객으로서 본다면 이는 결코 좋은 모습이 아니죠. 


원래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편인가 봐요. 예전엔 안 그랬는데 자연스럽게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에게 엄격해지더라고요.
그것도 30대에 접어들며 생긴 변화예요? 아마 그런 거 같아요. 그 시기에 생각이 많이 변했으니까. 그동안은 스스로에게 칭찬을 많이 해준 거 같아서 이젠 채찍질을 하고 있어요. 


10년 후를 생각해볼까요? 20주년을 맞이한 고은성이 어떤 모습이길 바라는지. 인자한 사람이었으면 해요. 배우로서 이루고 싶은 부분도 중요하지만 그전에 너그럽고 여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해요.


인생의 지향점 같은 거네요. 네. 인품이 훌륭한 자가 결국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기 위해선 예전에 한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고 늘 깨어 있으면서 발전하기 위해 노력해야죠. 흐르는 물처럼요.    

 

 Stylist 박정아 Hair 최은영 Makeup 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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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EDITOR : 양혜연PHOTO : 임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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