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한지’라는 독보적 장르

한국적 정체성과 현대라는 시대정신을 입고 ‘한지’가 새 날개를 편다. 글로벌 미술관의 컬렉션 복원에 한지가 사용되며, 그 위상이 더욱 높아진 지금. K-미술을 이끌 또 다른 장르, ‘한지’ 작가들의 실험 정신이 꽃을 피웠다.

2021.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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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합 19-NV089(스타4), 한지에 혼합 재료, 지름 162cm, 해외 개인 컬렉터 소장

 

형형색색의 한지 조각 

전광영

화면을 채운 형형색색의 한지 조각. 전광영의 ‘집합’ 연작으로, 쪽, 오미자 등 다양한 천연 식물에서 색을 뽑아 한지에 입히고 수천 개의 스티로폼을 싸고, 손으로 꼰 실로 묶고, 그것을 다시 캔버스에 붙였다. 그 과정은 정성과 집념을 넘어 경이로움에 가깝다. 작은 삼각형 개체가 모여 거대한 하나를 이루듯, 그의 집합 연작은 압도적인 오라를 풍긴다. 초기의 ‘집합’ 연작이 오래된 한지 서적을 이용했다면, 최근의 집합 연작은 자연의 색을 더해 꿈꾸듯 화려해졌다. 그의 ‘한지’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 히스토리와 철학을 품는다. 우리의 삶과 이야기를 싸듯 한지로 싸고, 보자기를 묶듯 실로 묶었다. 한지 특유의 정감과 현대적 조형성의 만남. 그만의 작업이 탄생하기까지 무려 50년이 걸렸다.

 

 

 

The Wallpaper fish, 200×160cm, Papercollage on canvas(캔버스/ 한지 콜라주/ 아크릴), 2007

 

찢어 붙인 한지 콜라주 

세오

한국에서 동양화를, 독일에서 신표현주의 거장 게오르크 바젤리츠를 사사한 재독 작가 세오(SEO, 서수경). “대학 시절, 작업실에 널린 습작지를 찢어 붙여 화면에 콜라주하기 시작했고, 그 위에 색을 덧칠하고 한지를 덧붙인 게 그 시초다.” 수천, 수십만 장의 작은 조각들로 구성된 그의 화면은 평면이지만 입체로 다가온다. 한지를 찢어 사용해 잘린 부분의 결이 살아 있고, 그 때문에 재료의 온기가 전해진다. 수십만 장의 찢어진 종이 조각과 그 위에 덧칠한 몇 겹의 레이어를 통해 완성한 자신의 결과물을 두고, 그는 ‘혼돈을 통한 새로운 시스템’이라 명명한다. 동서양, 전통과 현대 등이 공존하는 그의 화면을 보자면 초현실적인 신비와 낭만, 알 수 없는 우수가 읽힌다. 

 

 

 

The Street, Mixed media on mulberry Hanji paper, 170×130cm,  2020, 갤러리현대 제공

 

수행하듯 태우고 덧붙이고 

김민정

그른 것을 떨쳐내듯, 작두로 한지를 자르고, 불로 일정하게 태운다. 숨을 고른 채 한지를 태우는 행위는 지난한 수행의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30년 동안 지필묵의 전통과 서구 추상미술의 조형 언어를 결합해 독창적인 작품을 선보여온 김민정. 동양화를 전공하고 이탈리아에서 수학한 그는 피부와 같은 재료인 ‘한지’에서 길을 찾았다. 한지를 태우고 난 뒤 생긴 그을음. 작가는 종이와 불이 협업해 만든 이 ‘자연의 선線’에 매료되었다. 그 속에는 종이가 썩어 사라지는 몇천 년의 시간이 함축돼 있다. 자연에서 시작해 자연으로 돌아가는 반복과 순환의 개념은 수없이 한지를 태우고 화면 속에 변주하는, 작가의 노동집약적인 수행과 맞닿아 있다. 김민정의 추상 뒤로 명상과 평온이 뒤따르는 이유다.

 

 

 

도시산수, 장지·분채·콩즙, 91×40cm, 2020
 

도시산수, 장지·분채·콩즙, 91×40cm, 2020 이미지 제공 갤러리그림손 

 

한지와 오방색의 변주

이영희

‘오색무지개’, ‘청산녹수’에 이은 이영희의 신작 ‘도시산수’에는 도심 속 아파트와 숲, 호수와 같은 풍경이 자리한다. 그는 한지를 세 번 겹친 삼합지와 오배자, 콩즙과 같은 자연에서 추출한 재료를 사용, 전통의 물성(物性)이 그려내는 세계에 주목한다. 특히 음양오행론에 기초한 흑, 백, 적, 청, 황의 오방색은 화면의 중요한 도구다. 그는 수작업한 삼합지에 천연염료를 칠한 뒤 분채를 수십 차례 덧칠해 올리고 콩즙으로 마감한다. 색과 색이 스민 화면은 오히려 더 투명하고 맑아진다. 전통 재료의 온화한 물성과 철학적 사유가 어우러진 이영희의 화면은 맑은 울림을 전한다. 색의 변주를 통한 마음의 풍경화. ‘도시산수’ 역시 아파트로 대변되는 풍경을 통해 현대인의 정체성을 되묻는다. 

 

About wish 2108, 135×97cm, 한지에 채색과 바느질, 2021, 이미지 제공 돈화문갤러리

 

바람을 실로 엮다 

김순철

묵직한 의자에 앞서, 화면을 가득 채운 불규칙한 실선의 정체에 강한 호기심이 인다. 김순철의 ‘어바웃 위시(About wish)’로, 한지 위에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한 작품이다. “나의 작업에서 바느질의 반복의 의미는 들추어 비워내고 정련하는 자신과의 소통의 방법이다. 힘을 가해 송곳으로 구멍을 뚫고 구멍을 통해 화면의 앞면과 뒷면을 이어 왕래하며 실을 쌓아가는 한 땀의 바느질은 차마 떨쳐버리지 못하는 내밀한 자신과의 소통의 언어이다.” 고단하고 반복되는 바느질의 되새김질은 길고 깊은 사유를 동반한다. 그 느릿한 사유의 시간은 섣불리 풀어내지 못한 내면의 속내를 식히는 치유와 자정의 시간이기도 하다. 작가는 담담한 일상의 바람을 ‘어바웃 위시’에 담아 대화하듯 실로 엮고 또 엮는다. 

 

 

 

무제, 광목천에 아크릴 물감, 가변 사이즈, 2012, 이미지 제공 헝가리 부다페스트 키셀리미술관, 피앤씨갤러리

 

동양의 한지에 매료된 이방인 

야노스 베르

외국 작가와 한지의 만남은 낯설다 못해 놀랍다. 때는 1980년대. 야노스 베르(Janos Ber)는 센 강변의 한 화구용품점에서 우연히 낯선 나라의 한지를 발견하게 된다. 온화한 한지의 백색 위에서 아크릴 물감이 때로는 물처럼, 공기처럼 투명한 색의 레이어가 가능해지는 것을 발견한 작가는 이후로 꾸준히 한지 작업에 전념한다. 언뜻 동양화의 일필 기법으로 완성된 것 같지만 그의 화면은 실제로 매우 완벽한 조형적 구성을 추구한다. 그만의 조형은 캔버스 위로, 때로는 공간으로 침투해 생동감 넘치고 정감 있는 선의 움직임을 펼쳐 보인다. 그 움직임에서 낯선 듯 친숙한 비움과 여백의 미학을 목도하게 된다. 그의 로제이스(Rosace) 시리즈는 에르메스의 카레 스카프로 출시되기도 했다.

 

 

 

무제, Gouache, Chinese ink on Korean paper, 224×170cm, Courtesy of the artist’s estate and Kukje Gallery, 1987,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종이를 자르고 뚫고 붙이는 

권영우

그는 세상에 없지만 그의 백색 한지 연작은 여전히 더욱 회자된다. 1970~80년대에 제작된 권영우의 백색 한지 작업. 이 시기는 단색조의 한지 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때이기도 하다. 당시 권영우는 여러 겹으로 겹쳐진 한지로 섬세한 질감을 강조하여 입체감 있는 표면과 리드미컬한 조형성을 추구했다. 붓과 먹을 배제한 채 오직 한지에 집중한 권영우. 그의 한지 작업은 손톱 혹은 일련의 도구를 반복적으로 이용하여 종이를 자르고 찢고, 뚫고 붙이는 등의 행위를 통해 그 물성에 천착했다. 종이의 물성과 우연성을 개입시킨 그만의 추상. 찢기고 뚫린 그의 한지 화면은 지극히 현대적이며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기존의 동양화를 넘어서는 실험적이고 새로운 문법, 그 선봉에 권영우가 있었다. 

 

 

 

잔해풍경(Wreck scenery1), 한지 콜라주 위에 먹과 채색, 금분, 은분, 각 60×60cm, 2019 

 

폐허에서 발견한 생명력 

구본아 

구본아의 ‘잔해풍경’에는 폐허의 벽, 말라버린 식물체 등 시간성을 느끼게 하는 낡은 사물이 등장한다. 작가는 캄보디아 유적지를 탐방하던 중 회색 폐허 속에서 총천연색 에너지를 뿜으며 뛰노는 아이들을 목격하게 된다. 폐허와 희망이 교차하는 아이러니하고도 낯선 풍경. 구본아는 콘크리트와 풀의 상반된 이미지를 결합해 인공과 자연이라는 묘한 교차를 끌어낸다. 그 틈에서 우리는 인공과 자연의 순환을 목도한다. 결국 ‘잔해풍경’은 시간의 흔적이자, 인공과 자연의 조화로운 순환의 풍경인 셈이다. 화면 속 신비감의 원천은 거기에서 비롯될 터이다. 특히, 정육면체로 잘라 이어 붙인 한지 콜라주 기법은 낡고 폐허에 이른, 그러면서도 입체적인, 그만의 벽(화면)을 완벽하게 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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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 설미현PHOTO : <더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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