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영화가 아닌 연극이어야 할 이유

어느날 살해당해 여섯 토막 난 여자의 시신이 발견됐다. 취조실을 배경으로 한 연극 <얼음>은 형사들이 용의자의 알리바이를 파헤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런데 무대 위에 용의자는 없다.

2021.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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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얼음>은 충청도 어느 소도시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을 두고 진실을 밝히려는 형사들과 용의자 사이의 팽팽한 기 싸움을 그린다. 흉기나 지문 등 결정적 단서는 없지만, 형사들이 입수한 피해자의 휴대전화에 평소 그녀를 흠모하던 후배였던 용의자가 보낸 문자와 통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러한 정황 증거를 토대로 형사들은 용의자를 압박한다. 그러나 용의자는 전교 석차 1~2등을 다투는 수재. 그의 치밀한 알리바이를 깨뜨리는 일이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무대 위에 용의자는 없다는 사실이다. 더 정확하게 진술하자면, 용의자는 무대 위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 흔한 ‘보이스 오프(등장하지 않는 인물이 대사를 하는 방식)’도 사용하지 않는다. 공연 내내 형사들은 마치 앞에 용의자가 있기라도 한 듯, 빈 의자를 앞에 두고 취조를 진행한다. 그것이 연극 <얼음>을 보아야 하는 첫 번째 이유다.


연극의 연출가는 영화감독으로 더 알려진 장진이다. 처음 작품을 구상했을 때 그는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썼다고 한다. 그렇게 한참 집필을 하던 중 ‘영화로 만들면 다소 진부할 수도 있는 미스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는 한 인터뷰를 통해 고백한 바 있다. 진범인지 아닌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용의자, 합리적으로 상대를 구슬릴 줄 아는 베테랑 형사, 그리고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다혈질 형사. 연극 <얼음>의 등장인물들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한 번쯤 마주친 듯한 인상을 준다. 


그래서 장진이 선택한 무대가 연극이다. ‘차라리 형식적으로 실험이 가능한 연극 무대에 옮겼을 때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는 연극으로 이 작품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가 언급한 형식적 실험이란, 용의자가 등장하지 않는 설정일 터다. 등장하지 않는 용의자의 몫은 고스란히 형사들에게 남겨졌다. 그렇다고 복화술을 하듯, 형사가 용의자의 대사를 술술 읊는 코미디는 아니다. 관객들은 용의자의 말에 반응하는 형사들의 대사로 용의자의 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이 연극은 형사로 등장하는 ‘배우들’의 연극이다.


배우들은 등장하지 않는 용의자가 마치 앞에 있듯 연기를 한다. 없는 게 인물만은 아니다. 장진은 대본에 용의자의 대사 한 줄 적어두지 않았다고. 형사들의 취조에 대한 용의자의 답변은 고스란히 배우의 몫이다. 때문에 배우들 각자가 용의자의 대사를 상상해가며 작품을 만들어갔다. ‘배우가 등장하지 않는 것’이 이 연극을 봐야 할 첫 번째 이유라면, 마치 용의자가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배우들을 봐야 하는 건, 이 연극을 봐야 할 두 번째 이유다.


심지어 여기 출연하는 배우들은 1인 2역을 소화한다. 베테랑 형사 역의 중진 배우는 능글맞은 반장 역을, 다혈질 형사 역의 젊은 배우는 소심한 순찰대원의 역을 맡아 상반된 성격의 인물을 연기해야 한다. 보통의 내공으로는 쉽지 않을 이 연기를 정웅인, 이철민, 박호산(베테랑 형사), 이창용, 신성민, 김산호(다혈질 형사)가 소화해낸다. 베테랑 형사 역 배우들의 연기야 스크린과 브라운관으로 이미 검증되었을 터. 다혈질 형사 역의 젊은 배우들이 선배들에게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몫을 해낸다.


이쯤에서 서사를 중시하는 독자들은 작품의 결말이 궁금할 수도 있겠다. 과연 용의자는 진범일까? 그렇다면 그토록 연모하던 선배를 왜 죽인 걸까? 사이코패스라서? 질투에 눈이 멀어서? 아니면 그는 사랑하는 사람도 잃고 누명을 써 옥살이를 하게 된 억울한 피해자일까? 그렇다면 사건의 진범은 누구일까? 진범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확인해야 할 것이다. 진범이 누군지 속 시원히 알려주지 않는 게 스포일러 방지 때문은 아니라는 사실은 연극을 보면 납득할 것이다.    

※ 이 글을 쓴 김일송은 공연 칼럼니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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