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도자기에 새긴 자연의 시

에르메스가 훼손되지 않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담은 파시폴리아 컬렉션을 새롭게 선보였다. 한 편의 시와 같은 이 컬렉션을 탄생시킨 포슬린 페인터 나탈리 롤랑 위켈, 에르메스 테이블웨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베누아 피에르 에머리와 이야기를 나눴다.

2020.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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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예술 장르는 저마다 아름다움과 가치가 있다. 독자성이 분명한 각각의 창작 형식 사이에서 우열을 가린다는 건 무의미하다. 그러나 특정 장르에 따라 떠오르는 주관적인 이미지는 있다. 그래서 누군가 내게 가장 낭만적인 예술 형식에 대해 묻는다면 아마 나는 ‘시’라고 답할 것이다. 시를 쓴다는 건 우리가 삶 속에서 무심코 지나치는 어떤 존재의 의미를 찾아주고 사회적으로 약속된 기의에 얽매여 있는 단어를 건져 올려 시어(Poetic Diction)라는 이름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다.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존재가 누군가의 호명을 받고 꽃이 되었다는 시구처럼, 이는 가히 낭만적이다. 에르메스의 새로운 포슬린 컬렉션 ‘파시폴리아(Passifolia)’를 탄생시킨 포슬린 페인터 나탈리 롤랑 위켈(Nathalie Rolland Huckel, 이하 나탈리)과 에르메스 테이블웨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베누아 피에르 에머리(Benoît-Pierre Emery, 이하 베누아)와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이 새로운 컬렉션이 서른 개의 포슬린 피스를 시어로 삼아 촘촘히 엮어내린 한 편의 서정시처럼 느껴졌다.

 


“파시폴리아는 꿈속의 자연, 이상적인 자연에 대한 찬사입니다. 에르메스에게 자연은, 특히 테이블웨어 컬렉션에서는 항상 함께해온 핵심 주제죠.” 베누아의 말처럼 어디서 본 듯하지만 어디서도 보지 못한 야생의 자연이 생생하게 표현된 파시폴리아 컬렉션은 나탈리와 베누아를 주축으로 에르메스 공방의 장인들이 긴밀히 협업해 완성했다. 리모주의 국립 장식예술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 포슬린 매뉴팩처인 베르나르도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나탈리는 그 누구보다도 섬세하게 대상을 포착하고 정교하게 도자기에 옮겨내는 포슬린 페인터다. 이번 컬렉션은 정원의 아름다움을 담아낸 1997년의 시에스타(Siesta) 컬렉션, 페르시아 미니어처에서 영감을 받은 2006년의 슈발 도리앙(Cheval d’Orient) 컬렉션에 이은 에르메스와 나탈리의 세 번째 컬래버레이션 컬렉션이다. “나탈리의 디테일을 관찰하는 능력과 대상의 감성을 해석해내는 실력, 그리고 정교하고 섬세한 표현력은 이미 첫 번째 컬렉션에서부터 여실히 드러났어요. 전통적인 보태니컬 드로잉과 예술 작품 사이를 넘나드는 파시폴리아 컬렉션의 테마를 제대로 구현하려면 반드시 나탈리와 작업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베누아의 말처럼 이번 컬렉션 진행에서 가장 중요한 기반은 아티스트에 대한 무한한 신뢰였다. 그래서 에르메스는 이전의 컬렉션 제작 시 고수한 매우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방식을 과감히 탈피하고 나탈리에게 가능한 한 자유롭게, 그리고 틀에 박히지 않은 자연을 창조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에르메스의 공방이 오랜 시간 축적해온 기술력과 새로운 시도를 통해 나탈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구현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디너 플레이트부터 볼, 크리머, 컵 앤 소서, 트레이, 티포트 등 서른 피스의 다양한 테이블웨어로 구성된 이번 컬렉션은 놀랍게도 그 어떤 피스도 동일한 패턴을 사용하지 않는다. 모두 각기 다른 드로잉이 새겨진 것. 서른 개의 다른 드로잉 패턴을 제작하는 일은 오랜 시간과 정성을 필요로 했고 나탈리의 섬세한 드로잉을 도자기에 옮기는 것 역시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보통 드로잉을 도자기에 옮기려면 디테일과 색상을 분리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파시폴리아 컬렉션의 경우 이 과정에만 2000시간이 소요됐다.

 

 

이번 컬렉션에서는 색채도 이전 컬렉션들보다 많은 32가지를 사용했는데, 이 중 절반 가까이가 그린 계열이었다. 기존의 컬렉션보다 색채의 수가 훨씬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같은 계열 안에서의 미묘한 차이까지 고려해 색채를 개발해야만 했다. “새로운 컬렉션은 에르메스의 오랜 노하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동시에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을 기회이기도 했어요.” 베누아의 말처럼 이번 컬렉션을 위해 정밀한 컬러 레이어, 숙달된 고온 유약 처리 등 에르메스는 그동안 축적해온 전문적인 기술을 십분 발휘했음은 물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높이가 높은 컵 안쪽 깊은 곳까지 드로잉을 채우고 싶어 한 나탈리를 위해 전용 도구까지 제작했을 정도. 덕분에 나탈리가 쓴 자연의 시는 에르메스가 완벽히 구현한 시어들로 채워졌다. 

나탈리가 그려낸 아름다운 드로잉을 입을 준비를 마친 화이트 에나멜 도자기. 

 

크로몰리소그래피 기법으로 실크스크린 프린트되는 과정. 

 

물론 베누아가 그저 나탈리를 지원하는 역할만 한 것은 아니다. 나탈리 역시 그래픽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시작해 현재는 에르메스의 테이블웨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약하는 베누아에게 깊은 신뢰를 갖고 그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며 작업을 진행했다. “페인트, 컬러, 패턴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아티스트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일하는 것은 저에게도 행운이에요. 베누아에게 드로잉의 구성이나 식물 선택에 관한 조언을 많이 들었죠. 특히 컬렉션의 피스 중 몇 개의 플레이트에 커다란 나뭇잎을 단독으로 그려 넣어 디테일에 집중하는 것은 베누아가 제안했는데, 그 아이디어가 파시폴리아 컬렉션을 한결 모던하게 만들었어요.” 컬렉션 피스의 과반수 이상은 마치 식물이 빽빽이 들어찬 열대 우림의 풍경을 포착해 고스란히 옮긴 것처럼 잎사귀와 꽃이 중첩되며 밀도 높게 드로잉이 채워져 있다. 그러나 몇몇 플레이트는 식물 세밀화를 확대한 것처럼 하얀 도자기 위에 하나의 잎사귀가 커다랗게 새겨졌는데, 이는 전체 컬렉션의 숨통이 되어주며 컬렉션에 리듬감을 부여한다. 마치 시의 운율처럼. 

 

나탈리의 섬세한 드로잉이 도자기 위에 새겨지고 있다. 

 

에르메스의 전문적인 고온 유약 처리 기술 덕에 파시폴리아 컬렉션의 색상을 풍부하게 구현해낼 수 있었다.

 

“베누아는 저에게 상상의 세계와 자연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고 그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죠. 에르메스가 저의 창의력을 존중해 자유롭게 작업을 진행할 수 있게 도와준 덕분에 베누아에게 받은 영감을 컬렉션에 적용할 수 있었어요. 꽃의 컬러를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색으로 채색한다거나 실존하지 않는 상상 속 식물의 종을 몇몇 피스에 그려 넣기도 했죠.” 시에서도 시적 허용이라는 이름 아래 시인 혹은 화자의 감정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도록 일상적 어법을 벗어난 표현을 쓰기도 한다. 나탈리 또한 가지, 잎사귀, 꽃을 초현실적으로 배치하기도 하고 실존하지 않는 색과 형태의 식물을 그려 넣는 등 일종의 시적 허용을 통해 컬렉션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나탈리가 의도한 풍성한 트로피컬 컬러와 섬세한 라인이 에르메스의 뛰어난 기술력으로 도자기에 고스란히 재현되었다.

 

“파시폴리아는 여러 식물의 이미지를 중첩해 표현한 열대 자연의 화려함과 하나의 잎사귀 디테일에 집중해 표현한 간결함 사이의 균형이 돋보이는 컬렉션이에요. 어찌 보면 하나의 컬렉션을 창조하는 것은 퍼즐을 맞추는 것과 유사합니다. 각 피스에는 뚜렷한 정체성이 살아 있지만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리듬을 이루고 조화롭게 어우러져야 하죠.” 베누아의 마지막 말은 내가 파시폴리아 컬렉션에서 느낀 시적 낭만이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우리의 삶 속에 스며 있던 자연의 면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가장 적합한 조형의 언어를 골라 리드미컬하게 표현해낸 이 컬렉션은 에르메스만의 방식으로 자연에 대해 노래하는 한 편의 시다.    

 

 

 

 

더네이버, 에르메스, 파시폴리아 컬렉션

CREDIT

EDITOR : 양혜연PHOTO : 에르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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