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딸과 함께 살 집을 찾고 있던 부동산 개발 사업가. 런던의 빅토리언 양식 주택을 선택한 그가 인테리어 디자이너에게 요청한 건 가족적이면서도 남성적인 취향이 살아 있고, 고전적이지만 스타일리시한 인테리어였다.
2020.08.12정장을 입고 시가를 피우며 위스키를 즐기는 남성들의 클럽 분위기가 떠오른다. 섹시함과 중후함이 교묘히 섞이도록 디자인한 거실. 피에르 프레이의 푸른 벨벳 원단으로 만든 소파는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제작, 오른쪽 벽면에 놓인 콘솔은 LA에서 발견한 이탈리아 미드센트리 모던 가구 디자이너 알도 투라 디자인, 그 위에 걸린 그림은 아티스트 샐리 제인 퓌르스트(Sally Jane Fuerst)의 <프랭키>다.
푸른 벽면과 빨간색 펜던트 조명이 보색 대비를 이뤄 생동감이 감도는 현관. 파리 인테리어 숍에서 발견한 다양한 종류의 나비 박제를 하나씩 액자에 담아 벽면 가득 걸어놓은 장식이 인상적이다. 하나의 유기체로 느껴지는 콘솔 테이블은 미국 조형 가구 디자이너 칼 스프링어(Karl Springer), 빨간색 무라노 글라스 조명은 1970년대 빈티지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10대의 두 딸과 아빠가 함께 사는 집이라니!’ 런던의 인테리어 디자이너 트릴베이 고든(Trilbey Gordon)은 오랜 친구이자 부동산 개발 전문가로부터 특별한 부탁을 받았다. 이혼 후 두 딸과 함께 살 집을 디자인해달라는 것. “그가 먼저 살던 집에서 갖고 나온 건 신중하게 모은 아트 컬렉션과 멋진 옷이 전부였습니다. 자신이 사용하던 책상과 의자 한 점도 가져오지 않은 터라 디자인 출발점을 찾는 것부터 쉽지 않겠다 싶었죠.” 하지만 고든의 예상과 달리 디자인 콘셉트를 잡는 것은 그리 까다롭지 않았다. 이혼 직후 친구는 소속감이 없어진 데 대한 공허함이 큰 만큼 새 출발에 대한 의지가 강했고, 그런 그가 원한 집은 안정감을 찾을 수 있는 ‘나다운 집’이었다. “자기 삶의 새로운 챕터를 여는 동시에 두 딸과 함께 가정을 재건하는 의미도 담겨 있기에 가족의 ‘역사’가 깃든 집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든의 친구가 오랜 고민 끝에 택한 집은 런던 북서부에 있는 빅토리언 스타일의 주택이었다. 흔한 양식 집이라 아무런 특색이 느껴지지 않아 좋았고,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빈 껍데기만 남은 상태와 같아서 개조하기 유리하다는 판단에 이곳을 선택했다고. 집의 규모와 입지는 고든의 친구가 바랐던 바와 일치했다. 3층 구조인 집은 아빠와 두 딸이 각자 독립된 생활 공간을 가질 수 있는 데다 테라스와 패밀리룸 등 공용 공간을 마련할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규모였다.
티파니 블루 마블과 브라스 소재를 이용해 만든 아일랜드와 주방 가구를 통해 마치 고급 호텔의 클럽 바 같은 분위기가 나도록 디자인한 주방. 원형의 브라스 조명은 1930년대 빈티지로 파리 벼룩시장에서 발견했다.
다크 블루 컬러로 차분하게 연출한 다이닝룸은 반짝이는 브라스 프레임의 가구와 파티션으로 고급스러운 포인트를 주고 멀티 컬러가 돋보이는 아트워크로 화사한 느낌을 더했다. 블랙 마블 테이블은 윌리 리초, 의자는 밀로 보먼이 디자인한 것으로 빈티지다. 장시간 노출을 통해 완성한 추상 사진은 영국 아티스트 제이슨 슐먼 작품이다.
“디자이너로서 이 집의 첫인상은 ‘감옥’ 같다는 느낌이었어요. 지어질 당시 구조를 그대로 유지한 상태인 데다, 2층은 긴 복도를 따라 작은 침실이 도열해 있어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친구는 이곳의 건축적, 구조적인 특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개조해도 괜찮다고 했어요. 그렇다면 공간 자체가 꽤 넓고 새로운 역사를 이식하기 좋은 토대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고든은 어둡고 조잡하게 분할된 공간을 개방적인 스타일로 개편했다. 1층 가운데에 주방을 배치하고 이를 중심으로 양옆으로 가족의 공용 공간을 마련했다. 주방 옆이자 집의 전면부에 해당하는 가장 큰 공간을 리빙룸으로 할애하고, 주방의 다른 한쪽으로 다이닝룸, 패밀리룸, 홈바가 연결되도록 배치했다. 2층은 영역을 나눠 두 딸과 아빠의 사생활 공간을 구분한 가운데 각 공간은 사용자의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연출했다. “무엇보다 10대 사춘기 소녀들의 자유롭고 감성적인 공간을 꾸며주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둘째 딸 침실은 메자닌 층으로 만들어 취침과 취미를 한 공간에서 별도로 즐길 수 있게 디자인했어요. 시팅룸과 베드룸, 그리고 욕실까지 들였죠. 독립한 아이들이 처음 구하는 스튜디오라 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최상층이자 다락에 해당하는 공간은 첫째 딸 방으로 변신했다. 방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호텔의 스위트룸 스타일로 개조한 다락은 하이틴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고.
테라스 정원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패밀리룸. 천창 아래 벽면에는 아티스트 안나 글로버가 뱀과 식물을 직접 그려 넣은 실크 월 패널 장식을 더해 공간 전체에 신비한 느낌을 선사한다.
소녀 감성을 잘 아는 고든이 자녀들의 방을 꾸미는 건 그리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다. 반면 한 가정의 역사를 재건해야 하는 ‘아빠’를 위한 인테리어는 디자이너로서 고민이 수반될 수밖에 없었다. “집주인은 급조된 집 같은 새로움보다는 원래 자신이 살았던 곳인 듯, 전통과 취향이 숙성된 분위기가 느껴지길 원한다고 했습니다.” 다소 추상적인 주문이었지만 디자이너는 오랜 시간 지켜본 집주인이 앞으로 이곳에서 살아갈 모습을 그려보았다. ‘1970년대 영국의 남성 사교 클럽, 그 안에서 정장을 입은 채 시가를 피우며 코냑을 마시고 가죽 제본의 고서를 읽는 신사의 모습’ 자체가 집주인의 라이프스타일과 맞아떨어지지 않을까? “복고적인 향수가 느껴지는 가운데 과하지 않은 섹시함이 더해지고, 파리의 부티크 호텔처럼 전통에 기반하지만 트렌디하면서도 글래머러스한 스타일이 돋보이는 인테리어 디자인을 제안했습니다.” 고든과 함께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그녀의 디자인을 이해하고 있던 집주인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작업은 무척 섬세하게 진행되었다.
짙푸른 바닷속의 고요함을 담은 마스터 베드룸. 캐노피 침대는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제작했다. 침대 머리맡에 걸린 그림은 모두 아티스트 크리스 문(Chris Moon) 작품, 베드 커버 패브릭은 패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코콘 투 자이(Kokon to Zai)의 수공예 제품이다.
런던 출신이지만 20대 초반 미국 LA로 건너가 살았던 고든은 당시 미드센트리 모던 디자인을 처음 접하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고, 건축가 존 로트너(John Lautner),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 그리고 맥시멀리스트로 잘 알려진 인테리어 데커레이터 토니 듀켓(Tony Duquette)이 가구부터 스타일링한 집은 지금까지도 그녀의 작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드센트리 모던 가구 디자이너 밀로 보먼(Milo Baughman), 알도 투라(Aldo Tura), 폴 에번스(Paul Evans), 칼 스프링어(Karl Springer), 윌리 리초(Willy Rizzo) 등의 창의적인 가구를 탐구하면서 보낸 시간은 디자인에 대한 저만의 심미안과 스타일을 갖는 기초가 되었죠.” 고든은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기 전, 잡지 <보그>에서 패션 에디터로 일했고, 덕분에 색깔을 쓰는 데 과감할 뿐 아니라 트렌드에 민감하지만 유행은 오고 가는 것이라는 깨달음도 얻었다. “저는 유행에 연연하지 않고 다양한 것, 의외의 것을 조합하려 노력합니다. 서로 다른 시대에 탄생한 디자인을 짝짓다 보면 무언가 깊고 오랜 사연이 담겨 있는 듯하면서도 위트 있고, 유쾌한 느낌이 나기 때문이죠.” 고든은 이 집을 위해 런던의 앤티크 숍부터 파리, LA, 마이애미 등에 있는 빈티지 숍, 옥션 하우스를 돌아다니며 희소성 높은 가구와 소품을 찾는 데 열정을 쏟았다. 그의 노력은 1층 거실과 주방에서 아름다운 결실을 맺었다. 영국 신사들의 사교 클럽을 모던하게 표현한 거실은 마이애미에서 발견한 디자이너 알도 투라의 에메랄드빛 빈티지 콘솔을 통해 중성적인 우아함이 돋보이는 공간이 되었다. “콘솔에서 영감을 얻은 색깔을 소파와 커튼, 카펫 등에 적용했고, 이로 인해 자칫 고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짙은 오크 바닥과 예술 제본 서적이 빼곡히 꽂힌 책장의 조화가 전형성을 탈피할 수 있었답니다.”
패밀리룸 한쪽에 마련한 홈 바. 브라스로 만든 캐비닛과 대리석으로 마감한 바닥이 럭셔리한 스타일을 완성한다. 캐비닛 안에 정리된 글라스는 모두 옥션 마켓에서 구한 빈티지다.
주방은 1930년대 파리 약국 인테리어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했다. 유리창 도어가 달린 옛 약국의 캐비닛을 닮은 황동 주방 가구에는 빈티지 글라스웨어가 진열되어 있고, 그 아래 놓인 아일랜드는 거실의 에메랄드 컬러를 이어받은 티파니 블루의 천연 대리석으로 제작했다. “주방은 소재의 대비를 통해 럭셔리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게 목표였습니다. 다만 천연 대리석 자체가 색감과 패턴이 화려한지라 브라스는 무광으로 마감했어요.” 다루기 어려운 소재를 사용해 흔히 볼 수 없는 디자인으로 완성한 주방은 집주인은 물론 아이들도 만족하는 공간이다. 혹자에게는 ‘과시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돌과 금속으로 만든 주방 가구는 견고하고 실용적이라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게 집주인의 반응. “아일랜드 위에 걸린 원형 브라스 조명은 파리 플리마켓에서 우연히 구한 1940년대 디자인이죠. 그런데 주방 가구에 맞춰 제작한 거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고든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발품 팔아 구한 가구와 소품, 그리고 이를 단서로 풀어낸 인테리어 디자인은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한 가족의 삶을 담아낸 서사적 의미로 더 크게 와닿는다. 새 공간 앞에서 10여 년 넘게 쌓아온 가족사를 다시 써야 했던 집주인의 막막함은 오랜 친구이자 열정적인 디자이너 덕분에 명쾌하게 해결되었고, 나아가 앞으로 전개할 라이스프타일을 설정하게 된 계기가 되었기 때문. “제가 패션 기자 출신이라 그런지 몰라도 집도 촬영 세트처럼 연출하는 걸 좋아해요. 어느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도 ‘그림’이 나올 수 있게 말이죠.”
마스터 베드룸에 있는 욕실은 집주인의 편안한 휴식처가 되도록 차분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블랙 브라운 톤의 마블 타일로 마감했다.
오리엔탈 스타일의 석탑과 앤티크 벽난로 프레임을 선반으로 재활용한 욕실. 마블 타일과 욕조와 수전은 모두 영국 럭셔리 욕실 전문 브랜드 C.P HART 제품이다.
집주인이 잃어버린 과거를 그리워하기보다는 새로운 무대에서 멋진 주인공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만든 집.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둘러싸여 살다 보면 공간에 영혼이 담기고, 이는 곧 한 가정의 스타일로서 영원성을 갖게 된다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고든의 믿음이 이 집에 깊게 뿌리내리기를 바란다.
Interior Design Trilbey Gordon Design+Interiors(Www.trilbeygordoninterior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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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 한지희PHOTO : BNDicte Drummond(Photofo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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