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산을 바라보다

우리 곁에서 자연의 숭고한 아름다움을 가르치는 산. 미술 작가들에게도 늘 같은 자리에 우뚝 서 있는 산은 무한한 영감과 위로를 주고받는 존재다.

2019.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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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관악산
김정헌_관악산이 보이는 풍경, 불타는 관악산, 캔버스에 유채, 53×65cm, 2015

예부터 관악산은 불의 기운을 가졌다고 하여 화산(火山)이라 불렸다. 그 기운이 너무 세서 무학대사는 이를 달래기 위해 사찰을 세웠고, 광화문에 자리한 해태상도 그런 이유에서 존재해왔다. 상상 속 동물인 해태는 불을 먹는다고 알려졌다. 땅과 흙, 그 위에 사는 존재들의 고단한 일상을 그리며 미술을 통해 민초의 땀을 드러내고 좀 더 이성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를 꿈꿔온 김정헌 작가는 4년 전 아파트촌 뒤로 우뚝 솟은 관악산의 저녁 풍경을 그렸다. 북쪽에 서서 남쪽으로 바라본 관악산은 저물 무렵의 붉은 노을로 활활 타고 있다. 한평생 그림을 그렸고, 미술가로서 사회 참여적 발언을 멈추지 않은 칠순을 넘긴 작가의 눈에 활활 타오르듯 빨간 노을로 뒤덮인 관악산이 강렬하게 다가온 것은 단순히 산 이미지와 스토리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존재의 경외
황세준_꿀 조국 새 아침, 캔버스에 유채, 236×167cm, 2014

시야를 가리던 미세먼지가 걷히고 나면 서울은 병풍처럼 둘러싸인 산을 드러낸다. 사람이 만들어낸 물질세계 사이로 불쑥 존재감을 드러내는 산들. 서울처럼 산이 많은 도시도 드물다. 황세준 작가는 도시인의 삶에 가깝게 붙어 있는 산을 캔버스에 보조적으로 등장시켰다. 아침저녁 빛에 따라 기적 같은 모습으로 우뚝 서 있는 산에서 묘한 긴장감과 경외감마저 느껴진다고 말한다. 작가는 풍경이나 사물 자체로 그려야겠다고 마음먹은 인상적인 장면들 또는 어떤 질문으로 다가오는 풍경을 그리는데, 2014년에 발표한 도봉산, 관악산, 북한산 3점 연작 ‘꿀 조국 새 아침’의 작업 동기는 후자에 속한다. 숭고미가 느껴지는 명산이 많은 땅에서 우리는 이렇게밖에 못 사나, 되묻고 싶었다고. 긴장감을 이루는 화면 구성을 선호해온 작가가 포착한 서울 큰 산들의 대표 모습은 서로 어우러지며 특이한 에너지를 건넨다. 사람이 정수리에 레이더 기지를 꽂은 산이라 해도 말은 없다. 늘 강건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서 있을 뿐이다.

 

 

 

북한산 밤산책
김기수_북한산, 캔버스에 유채, 181.8×227.3cm, 2011

오랜 시간 구기동에 머물며 작업을 해온 작가는 북한산 자락과 이어지는 작업실 동네를 산책하며 그린 그림을 8년 전 <밤산책>이라는 이름의 개인전에서 발표한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린 동네에서 마주친 풍경은 20여 점의 캔버스에 섬세한 감정으로 담겼다. 작가를 아는 이들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기억하는 작품 ‘북한산’도 그중 하나다. 해 질 무렵 북한산 문수봉 정상에서 서쪽 능선, 한강 줄기가 내려다보이는 풍경을 150호 캔버스에 담았는데, 산수화가 취하는 관조적 태도를 실험한 작품이라고 작가는 설명한다. 과도한 부분 몰입과 낭만적 요소를 덜어내고 총체적인 관점에서 북한산과 서울의 한 부분을 바라보고 표현한 풍경화다. 유화이든 수묵이든 표현 재료가 어떤 것인지 이 그림에서는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일상의 시공간을 다른 차원으로 전복시키는 산의 존재가 이토록 신비로우니 말이다. 북한산의 아름다운 일몰 풍경을 한동안 일상으로 둘 수 있던 것만으로도 작가에게는 행운이 아니었을까.

 

 

 

지리산과 캔버스
김지원_풍경 시리즈, 리넨에 유채, 24×34cm, 2016~2017 

김지원 작가의 작업실 벽에는 오랫동안 관광엽서가 붙어 있었다. 엽서 뒷면에는 ‘우리나라 산 중의 왕자 지리산’이라고 쓰여 있다. 
아마도 지리산 여행 후 가져온 엽서일 것이다. 지리산 고사목 지대로 보이는 빛바랜 사진 속 풍경은 구상나무와 가문비나무 군락이었다. 
작가는 회화적인 요소가 다분한 이 풍경을 반복해서 그렸다. 지난 5월 개인전 <비행>에서 발표된 ‘풍경’ 작품만 14점이나 된다. 바람이 있는 경치 그림이라는 풍경화의 뜻에 따라 3차원의 시공간을 2차원 공간으로 옮기는 작업에 작가는 바람의 존재를 표현한다. 같은 산중의 모습을 다른 색채와 표현으로 각기 다른 그림을 완성한다. 그 연구로 캔버스의 높낮이도 다 다르다. 같은 것을 그려도 매일 똑같지 않은 그림을 반복해 그리며 작가는 그곳에서 회화의 본질을 찾는다. 
너무 높아 깊고 방대한 지리산 자락에서 발췌된 한 뼘 사진은 작업실에서 매일을 살고 그리는 작가에게 개념의 풍경이 되어주었다.   

 

 

 

인왕산을 옮기다
민정기_인왕산, 캔버스에 유채, 214×385cm, 2019

전통 동양화나 고지도 방식의 고유한 화풍. 40여 년을 회화 영역에서 일상 풍경을 그려온 민정기 작가의 스타일이다. 1970년대 이발소 그림이라 불리는 다소 파격적인 작품을 선보이다 이후 주로 산세와 물세 같은 지형적 요소와 그 안에 어우러진 인간의 흔적을 중점적으로 다뤄왔다. 도시가 어떤 방식으로 변해도 인왕산의 신비롭고 아름다운 자태는 가려지지 않는다. 화가로서 욕심을 낼 수밖에 없는 인왕산과 주변 동네를 민정기 작가는 오랜 시간 샅샅이 걸었다. 과거의 역사를 들여다보고 산 전문가와 등반하기도 했는데, 종국에 겸재 정선을 만난다. 겸재의 ‘한양진경’은 화가로서 욕심을 낼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하여 이런 그림이 되었을까를 연구하며 작가는 가운데 주봉을 중심으로 인왕산을 거의 지도에 가까울 정도로 표현한다. 인왕산의 아름다움이 어디에서 잘 보이는지 긴 산책을 통해 발견하며 지금은 없는 한옥의 기와 풍경 대신 주변 동네를 아래에 배치한다. 작가는 2007년에도 이와 같은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 10년이 지나면서 변화한 그림 속 스토리를 함께 들여다보며 우리 삶은 얼마나 바뀌었는지 생각해볼 만하다.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하다
박대성_백두산, 한지에 수묵, 515×436cm, 2019

화폭이 4m가 넘는다. 높이도 5m가 넘으니 층고 높은 미술관의 벽 한 면을 채운다. 백두산, 한라산, 지리산 등 한국 명산의 아름다움을 담기 위해 박대성 작가는 최대한의 면적을 확보하고자 했을 것이다. 종이도 그만 한 크기는 없다. 사방으로 이어 붙인 종이 위에 부드럽고 유연한 곡선과 힘차게 각진 필선이 독특한 조형미를 이루며 교차한다. 먹색의 농도에 따라 가깝거나 먼 풍경을 표현한 거리감은 내부에 깊은 공간을 만든다. 박대성 작가는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청전 이상범과 소정 변관식으로 이어져오는 실경산수의 전통을 이어가며 어릴 때부터 몸과 마음으로 익힌 화풍에 서예 등을 얹어 독특한 세계를 창조한다. 한국전쟁 때 부모를 여의고 한쪽 손까지 잃어버린 후 오직 그림을 그리며 산 작가는 칠순을 훌쩍 넘긴 지금도 여전히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역경을 뛰어넘은 그의 기도가 크고 높은 산 그림이 되어 평화를 향한 염원이 됐다는 것이 산의 존재만큼이나 기적처럼 느껴진다. 

 

 

 

치열한 희망
김보중_아차산-가을, 아차산-겨울, 패널에 유채, 2017 

아차산은 해발 300m가 채 되지 않는 야트막한 산이다. 광진구와 중곡동 사이에 위치해 망우산, 용마산과 이웃하며 일대의 낮은 산세를 형성하고 있다.  낮은 만큼 동네 사람들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자리한다. 김보중 작가도 청년 시절 용마산 자락인 중곡동에 10여 년간 거주하며 아차산을 자주 올랐다.  1986년 첫 개인전을 발표하고 1988년 미국으로 유학 가기 전 2~3년간 용마산 능선과 시각적으로 대등하게 마주 바라본 아차산 능선 전경을 계절과 시간대를 달리하며 그렸다. 작가는 그 시기를 잠재적 침묵기라고 표현했다. 화가로서 앞으로의 화업에 대한 질문을 거듭하던 시기에서 다른 시기로, 한 공간에서 또 다른 공간으로 이행을 앞두며 느낀 막막한 불안감이 존재한 시기에 아차산은 “굳세어라”라고 강권했다. 갓난아이와 함께 먼 여정을 떠나야 하는 작가의 불안한 심정을 위로했던 아차산 작업은 오랜 세월 발표하지 않았고 몇 점은 분실하기도 했다. 최근 작가는 아차산의 새 작품을 내놓았다. 아차산 그림은 막막한 시간을 가르고 이어지는 새 챕터의 문을 열어온 전환기적 행보의 산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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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 한지희PHOT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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