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다시, 북촌 산책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까지 치르며 변화한 북촌 100년사를 담은 전시를 보았다. 고층 빌딩 가득한 서울에서 과거의 역사에 숨을 불어넣는 북촌 한옥과 그곳에서의 삶을 다시 한번 굽어본다. 한옥의 변화는 근대화의 역사다.

2019.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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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에서 경복궁, 중앙청을 바라본 북촌 전경. 북촌에 거주하던 조선일보 사진가 임인식 선생이 찍은 1954년 사진이다.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북촌은 지리적 위치만으로도 특별함을 갖는다. 궁과 가까워 궁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주거지로 북촌을 선호했다. 북촌은 조선 시대 권세가 사대부들이 살아온 터전이고 갑신정변을 비롯해 3.1운동, 독립운동과 같은 역사적 사건의 중심지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혜택 받으며 사는 남촌의 모습과 비교되며 차별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오랫동안 조용하던 북촌은 조선 후기 고종 시대부터 변화를 맞는다. 경복궁 중건으로 양궁 체제의 장소성을 회복한 1860년대부터 거주민 변화가 본격화한 한국전쟁 후 1960년까지 약 100년간 북촌은 격변의 시기를 지나온다. 서울역사박물관의 전시 <북촌, 열한 집의 오래된 기억>은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루어진 북촌의 변화와 생활상을 보여준다. 북촌 거주자들에게서 수집한 책과 집기, 사진 그리고 후손의 구술 정리를 토대로 한 전시다. 흥선대원군 둘째 형인 흥완군의 아들 완순군 이재완, 1900년대 초 원서동 빨래터 인근에 자리 잡은 이종렬가, 안국동 100년 가문 윤보선, 계산한의원 홍성학, 조선미술관 오봉빈, 백병원 백인제, 북촌 이왕직 관사 생활을 한 민영환과 민영찬의 후손, 건축 청부업자 박한기, 이왕직 아악부 대금 연주자 봉해룡, 종군 사진작가 임인식, 한국전쟁 후 원서 이발소를 운영한 김창원 등 열한 가문이다. 이들의 지역성을 함축한 삶은 북촌 밖 사람에게 적지 않은 흥미를 일으킨다. 거주 시기가 달라 근대화의 역사와 북촌 한옥의 변화, 삶의 모습까지 실어 나르고 있다. 

 

건양사의 건축 청부업자 정세권이 개발한 삼청동 35번지 일대의 전경. 비슷한 모양의 도시 한옥이 한 구역 안에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우리가 만나는 북촌 한옥 대부분은 현대식으로 개조된 형태다. 현재 과거의 모습과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닌 공간으로 변신해 누군가의 집으로, 카페로, 갤러리로 이용되고 있다. 이런 한옥들 또한 일찍이 북촌이 겪은 근대화를 통해 개선된 모습이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 한옥의 역사를 너무 모르면서 북촌 길을 걸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빠른 근대화를 꿈꿨던 갑신정변은 실패했지만, 변화의 바람을 전면으로 맞으며 살아온 북촌 사람들을 통해 한옥을 다시 보게 되었다.

 

 

안국동에서 100년을 지킨 윤보선가의 한옥. 처음 지어진 시기로 추정되는 1910년대에는 99칸 규모였다. 일찍부터 기독교의 영향과 외국 유학 경험 등으로 윤보선가만의 가풍과 생활 안목을 만들어왔다. 

 

한옥촌에 부는 변화의 바람
북촌에 처음 가시적인 변화가 진행된 것은 1884년 갑신정변 때다. 북촌 지식인들이 주도한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나고 김옥균 등이 거주하던 재동 일대의 넓은 집터들이 몰수된다. 그곳에 근대 교육기관과 시설이 들어서며 북촌의 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일제강점기에는 한옥 자체도 변화를 겪는다. 처음으로 ‘건축’이라는 개념도 생겼다. 건축가는 물론 필지를 판매하고 건축을 알선하는 건축 청부업자까지 생겨나 한옥을 개선하자는 목소리도 높아진다.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 중인 <별건곤>(1927)의 ‘방학 동안의 경성 거리’ 삽화. 북촌의 학교 밀집도를 보여준다. 

 

임인식 사진가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 임정의에게 집에 잘 찾아올 수 있도록 항공 사진을 잘라 만들어준 명함판 약도. 

 

현재 북촌에 남아 있는 한옥들 대부분은  1920~1930년대 조선인 건축 청부업자들이 건설한 것으로 알려졌다. 건축 청부업이라는 직업이 낯선데, 지금으로 생각하면 분양업자의 역할에 가깝다. 건축 청부업은 1897년 경인선 부설 공사 때 국내 진출한 일본인을 통해 처음 소개되었다. 이들은 단순히 건축물이나 주택을 시공만 한 것이 아니라, 건축에 필요한 자금을 빌려주거나 은행 대출을 알선하기도 했다.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거나 가짜로 건축 자금을 모으는 등 사기도 빈번했다고 한다. 한편 조선인이 건축 청부업자로 먹고살기는 어려웠는데,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서 실시하는 대규모 공사 대부분이 일본인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민가에서 건물을 짓는 일도 드물고, 있다고 해도 그 수는 매우 적었다. 북촌의 도시 한옥 건설을 맡은 건양사의 정세권, 김종량, 정희찬 등에 대한 기록은 희소할 수밖에 없다. 건양사는 경상남도 고성 출신의 조선인 사업가 정세권이 1920년 종로구 익선동을 기반으로 설립한 건축 청부 회사다. 신문 기록을 보면 처음엔 오래된 집을 고쳐 되팔며 사업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건양사가 북촌에 본격적으로 집을 짓기 시작한 때는 1930년대다. 조선 부호들이 몰락하면서 일본인 소유가 된 대형 필지들이 분할되어 주거용 택지로 시장에 보급된다. 집을 짓고자 하는 수요가 증가한 것이다. 또 넓은 필지에 건설되는 전통 한옥에서 벗어나 점점 효율적인 도시 한옥 건설에 주력하게 된다. 


 

서양화가 고희동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1918년에 이 집을 설계, 등록문화재 제84호로 지정되었다. 서양 주거 문화와 일본 주거 문화의 장점을 받아들여 ㄱ자형 구조로 지은 4동의 단층 목조 개량 한옥 형태다. 작업실 공간은 물론, 사랑채와 안채를 잇는 길고 좁은 복도와 유리문도 눈에 띈다. 

 

은덕문화원은 전통 한옥으로 지은 건물과 일제 시대에 지어진 인화당, 60여 년 전에 지은 현 싸롱 마고 등 시간에 따른 세 가지 건축 양식을 품고 있다. 대각전 위의 일본식 주택 인화당은 독립운동가들의 비밀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문헌상 조선인 최초의 건축가로 알려진 이훈우는 주택 개선을 언론에 피력한다. 1923년 1월 1일 <동아일보> 기사에 이훈우 건축사의 대담이 실렸는데, 한옥의 개량과 신식 주택에 대한 내용이다. 한옥의 ‘행랑방과 부엌을 개량할 필요’ 등 주로 ‘미관과 위생’을 강조하며 개선해야 할 점을 피력한다. 부엌과 변소의 배치, 크기, 동선으로 발생되는 위생 문제, 집 높이가 낮아 일조량이 부족해 야기되는 위생 문제, 천장이 낮아 공기 흐름이 나쁘고, 여름 습기가 많아 발생되는 위생 문제를 지적했다. 한편 한옥의 온돌 난방, 두터운 벽, 이중문은 지역 기후에 적합하고 실용적인 방식임을 언급한다. 건축사 박동진도 <동아일보>에 주택 기사를 연재한다. 그는 인촌 김성수가 설립한 중앙고등학교 계동 1번지의 본관을 설계한 인물로 조선총독부의 건축 기수였다. 새로운 사회에 걸맞게 주택도 개선돼야 한다며, 풍속과 풍토 기후를 고려해 우리만의 주택을 계획할 것을 주장한다. 당시 건축가들의 논쟁에 자주 오르내린 공간은 부엌이다. 종로 화신백화점, 북촌 전용순 가옥, 현재 인사동 민가다헌으로 이용되는 민영휘의 한옥 주택을 설계한 건축가 박길룡은 채광과 통풍이 잘 안 되고 동선이 불편한 점을 부엌의 단점으로 꼽았다. 한옥뿐만 아니라 당시 양식에 기대 건설된 문화 주택도 부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록된다. 건축 청부업자인 정세권도 한옥의 온돌 문화는 살리되, 부엌과 변소의 배치 문제는 개선하고, 응접실과 가족실, 서재 등 근대적 가족 개념에 맞는 공간을 도입할 것을 강조한다. 북촌 사람들은 다행히 건축가와 건축 청부업자의 실험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다. 

 

 

백인제 가옥의 솟을대문을 지나 왼쪽으로 난 중문간채를 통과하면 ㅁ자 한 동으로 연결된 안채가 나온다. 가족들이 주로 생활했던 공간이다. 안대청의 내부. 우물마루가 보인다. 

 

절충형 한옥, 백인제 가옥
현재 북촌에서 규모 있는 한옥은 안국동의 윤보선 가옥과 가회동 백인제 가옥이 대표적이다. 두 가옥이 같은 양식의  한옥은 아니다. 우선 윤보선 가옥은 1880년대 조선 말에 지은 ㄱ자형 전통 한옥이다. 민가 한옥으로는 가장 큰 규모였던 이 한옥을 1918년 윤보선 대통령의 아버지 윤치소가 매입한다. 응접실과 복도 등 근대적 공간 구조로 변경하고 부속동을 신축하는 등 현재의 모습을 갖춘다. 윤보선가는 2002년 사적 제438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까지 가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한편 백인제 가옥은 1913년 일제강점기 초반에 처음부터 절충식 한옥으로 설계되었다. 본래 친일파인 이완용의 조카 한상룡이 지은 집이라는 이유로 서울시가 2011년 매입할 당시 논란이 컸다. 그러나 한상룡 이후, 젊은 나이에 <중앙일보>를 인수한 최선익이 1944년까지 살았고, 2011년까지 백인제 가족이 살며 마지막 주인이 된다. 당시 의술로는 일인자였던 백병원의 백인제 선생은 3.1운동과 흥사단 소속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최초 친일파가 지은 집이라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절충형 한옥으로서 건축과 역사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1977년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제22호)로 지정된다. 백인제 선생은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게 되었고, 이후 아내 최경진 여사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살다가 2011년 서울시에 매각한다. 한국전쟁이라는 긴 시련을 거치고 너무 오래된 탓에 가옥은 훼손이 심해 복원 사업이 불가피했다. 주로 적송을 사용해 복원했는데, 한옥을 이루던 압록강 흑송은 기둥과 서까래에서 간간이 찾아볼 수 있다. 

 

별당채 누마루 내부. 밖으로 가회동 성당과 함께 북촌8경이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자리한다.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안채에서 사랑채로 이동이 가능한 복도. 복도의 시작과 끝에 서양식 나무문을 달아놓았다. 

 

절충형 한옥으로 설계된 백인제 가옥은 서구 주택과 일본 주택 등 새로운 주거 문화를 포용했다. 일단 전체적으로 주택의 폭이 넓고 지붕이 높다. 방과 방 사이를 긴 복도로 연결해 외부로 나가지 않아도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흙으로 만들어 습기에 취약했던 담벼락은 붉은 벽돌로 쌓았고, 문에는 종이 대신 유리를 사용했다. 바닥에는 온도와 습도에 뒤틀림이 적은 우물마루를 놓았다. 또 공간과 공간 사이를 잇는 복도의 시작과 끝에는 현대식 나무문을 설치했다. 문에 달린 둥근 문고리는 초기 방식 그대로 100년 된 것이다. 

 

북촌의 비교적 높은 지대에 위치한 사랑채 내부 대청. 한상룡이 집을 지은 후, 집 소유주들이 사회적 활동을 펼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백인제 가옥 별당 옆 담장 밖으로 보이는 현 정독도서관. 과거엔 경기고등학교 건물이었다. 백인제의 자식들이 아침에 늦게 일어나면 담장을 넘어 등교했다고 한다.

 

백인제 선생이 살던 당시에는 집 안에 일하는 사람이 많게는 11명이나 되었다. 음식 솜씨가 좋았던 최경진 여사는 손님들을 초대해 앞마당에서 냉면 파티를 열기도 했다고 후손들이 말한다. 정원과 사랑채, 별당 등 가옥 여기저기에 음식을 놓았고, 정원을 감상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별당은 이 한옥의 보석 같은 공간이다. 지금도 별당에서 밖을 내다보면 가회동 성당과 한옥 지붕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저 멀리 남산타워까지 보인다. 2층 구조로 된 별당은 이 동네에서 가장 높은 전망을 자랑한다. 또 과거에는 화장실과 목욕탕이 가옥 내 마당에 있었다. 1940년대 수도 시설을 설치해 물을 보급하는 시스템을 갖췄으나 안 나올 때가 많았다. 별채 앞과 사랑채 마당이 있는 곳에 땅을 파서 우물을 만들었다. 우물과 연결해 사용해야 하는 목욕탕 위치 때문에 불편했다고 후손들은 이야기한다. 

 

안채를 조망한 모습. 나무 안쪽 바닥에 방공호로 이어지는 문이 있다. 

 

백인제 가옥에는 방공호도 있다. 이사한 후 한창 태평양 전쟁 중이어서 백인제 선생은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방으로 연결해 대청마루에서 금방 내려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후에는 술을 저장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건축학적으로 가치가 높음은 물론이고, 북촌의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진 백인제 가옥은 현재 시민들에게 개방되어 투어 프로그램과 공연 등의 이벤트가 진행되고 있다.   

 

 절충형 한옥의 특징 중 하나인 벽돌로 축조된 꽃담. 

 

자료로서 존재하는 한상룡의 또 다른 주택인 가회동 178번지 한씨 가옥, 1950년대 사진 속에 남아 있는 이달용과 이해선의 가회동 30-2번지 주택, 원서동 129번지 전은덕 가옥, 원서동 16번지 고희동 가옥 등은 백인제 가옥과 함께 절충형 주택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중 현재 은덕문화원으로 운영되는 전은덕 가옥은 역사의 스토리를 함축하는 독특한 가옥 구조를 보인다. 1900년 이후 일제강점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가옥에서는 이곳에 거주하던 일본인이 한옥에 일본식 집을 얹어 지어 두 가지 양식이 결합된 독특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온 고희동 화백이 1918년에 지은 고희동 가옥 또한 시민에게 개방되고 있다. 고희동 가옥은 전통적인 마당과 대청으로 구성된 한옥의 구조에서 벗어난 실용 한옥의 모습을 하고 있다.  

 

대지 2460m2 규모의 부지에 들어선 백인제 가옥의 대문간채. 지대가 꽤 높아서 수도 시설이 놓인 당시 물이 잘 안 나올 때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겹집의 형태로 기존의 경기형 민가와 다르다. 안채 일부를 2층으로 건축한 모습은 전통 한옥에서는 매우 드문 이곳만의 특징이다. 

 

일제강점기 후기 한옥은 어땠을까. 가회동, 삼청동, 팔판동 일대는 고작 40년 사이에 엄청난 변화를 맞는다. 지금처럼 차 한 대도 들어가지 못하는 골목길을 두고 달박달박하게 한옥이 들어선 모습은 앞서 언급한 대형 필지를 나눠 소형 도시 한옥을 대량으로 개발했기 때문이다. 북촌 가회동에서 1952년부터 1962년까지 10년간 거주한 <조선일보> 사진가 임인식 선생은 이러한 동네의 변화를 항공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옥 숫자가 늘어난 만큼 북촌의 인구도 늘어난다. 이는 경성의 인구가 증가해 주택난을 겪은 것과도 관련이 있다. 또 1928년 율곡로가 개통되어 교통이 편리해지고, 재동학교, 계동학교, 경기중고등학교, 경성전문대학 등 고등 교육 시설이 밀집된 것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별당채. 북촌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서울역사박물관의 전시에는 임인식 선생의 귀중한 사진들은 물론, 경상남도 거창 유지의 아들이었던 박한기 선생이 상경하여 북촌에서 산 20년의 삶도 기록하고 있다. 박한기 선생이 살았던 가회동 31-56번지는 건양사 정세권이 개발한 도시 한옥이다. 우연한 기회에 전시를 관람해 한옥을 다시 살피며 얻은 수확은 크다. 북촌을 그저 여가를 보내는 장소로 방문해왔다면 이제는 역사와 건축학적인 변화, 북촌 사람들의 살아온 이야기까지 얹어 감상할 수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백인제 가옥, 고희동 가옥, 은덕문화원 등 직접 방문 가능한 한옥도 있다. 그곳에서 공연과 각종 문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니 앞으로 북촌에서 보내는 여가가 더 즐거워지지 않을까. 

 

REFERENCE 참고자료
<북촌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11가의 오래된 기억>, 
<북촌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의 터전>

 

 

 

더네이버, 전시, 북촌 한옥, 북촌 100년사

CREDIT

EDITOR : 한지희PHOTO : 양성모,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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